명희의 술잔 -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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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의 술잔-명희의 술잔-
‘꽈당……에구구’
백화점의 인파 사이에서 난 잠시 뒤를 돌아다 보다가, 누군가와 부딪쳐 뒤로 발라당 까지고 말았다.
‘앗, 띠발, 뉘기야…앞 쫌 제대로 보고….’
‘근데…..아자씨, 바지 앞이 열렸는데….’
‘엥?’
난 먼저 일어나 무슨 소리라도 하려다가, 기냥 놀라 고개를 구부려 바지를 살폈다. 이런, 망신, 개망신이 있나? 그제서야 나는 바지 앞섶의 지퍼를 올리면서, 송구스러운 듯이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데라도…’
‘어? 너 혹시, 철구?’
‘어라? 너 명희?’
그녀는 중학교 동창 명희 였다. 손명희……양 손 가득히 명품을 쇼핑한 듯 보이는 그녀……중학교 때처럼, 그 놈의 돗수 높은, 엿 같은 뿔테 안경은 아직 쓰고 있었다. 그 굵기만 쫌 얇아 졌을 뿐, 그 요상하고, 멍청틱한 모습은 여전했다. 하긴, 그 때 당시, 별명이 멍희 였으니……왜냐구? 그 당시, 명희는 그야말로 나이로 봐서, 푼수의 별명을 붙이기에는 너무 어려, 친구들 사이에서 그녀는 멍청한 명희로 통하다가, 그냥 멍희로 바뀐 때문이었다. 멀뚱한 키에다, 눈도 오지그리 나쁜지, 앉은 키가 절나 큰대도 불구하고, 허리를 꾸부정하게 구부리고, 맨 앞자리 구석에 책걸상을 따로 놓고 앉았던 멍희…..그녀의 무릎은 언제나 까져서 그랬는지, 아니면 무엇 때문 이었는지, 반창고가 떨어질 새가 없었고, 공부 시간 이든, 쉬는 시간 이든 간에 그녀로 인해 발생하는 해프닝은 과히 백과사전 감 이었다.
‘Why? MyungHee, Any Question?(왜, 명희양, 무슨 질문 이락두)’
그 당시, 드물게 파란 눈의 선생이 영어를 가리키던 시절, 공부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난 그녀.
‘Yes, I have. He does not study now! ChulGu is now picking his nose hardly!(네, 있는 데여, 철구가 지금 공부 열나 안하고, 딴 짓하고 있걸랑여. 디리 코꾸녕 파고 있다니깐여!)’
나 이런! 지나 잘할 것이지, 그녀는 내가 공부를 하든지 말든지, 상관할 일이 아니었는데도, 내가 코만 파고 있는 것처럼 고자질을 한 것이었다. 그것도 영어로….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뒤에 앉은 사람이, 그녀의 앉은 키가 너무 큰 관계로, 하도 지분대는 바람에, 허리를 구부리고 수업을 받는 것이 도저히 고통스럽다며, 스스로 책걸상을 교탁 옆으로 놔 둔 것 까지는 좋았는데, 언제나 하루에 한번은 아이들을 까르르 돌아가시게 하던 그녀 였다.
‘깔깔깔…..’
교실 안이 갑자기 쏟아지는 웃음으로 칠판에 수업 내용을 적어 내려 가시던 선생님께서, 획하고 돌아다 보시며,
‘조용히 적을 것이지, 뭔 말들이 이렇게 많아?’
그러나, 선생님의 눈 앞에는, 책상을 들고 엉거주춤한 몸짓으로, 거북이처럼 창가 쪽에서 교탁을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명희, 너 왜 그러냐?’
‘햇볕이 너무 따가와 디질 것 같아서….’
그러고 말 멍희가 아니었다.
‘선생님은 마저 쓰세여, 전 제 갈길, 갈께여.’
아이들이 자빠졌다. 그녀는 굳건하게 그 똥싸는 폼으로 일체형 책상을 끌고, 입구 쪽으로 책상을 끌고 전진했다. 표정도 없었고, 자신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표정이었던 그녀…..그녀의 이사는 햇볕이 쏟아지던 오전에 한번, 해가 넘어간 오후에도 한 번 있었다. 왜냐구?
‘명희, 너 왜 그러는데?’
‘등짝이 시려워서….선생님은 마저 쓰세여, 전 제 갈길 갈께여.’
그렇게 소문이 난 그녀를, 선생님들께서는 그냥 놔 두셨다. 악의도 없었을뿐더러, 누구에게 주목 받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 듯싶다. 그녀는 그렇게 돌출적인 행동을 일삼았지만, 본인은 별로 그것에 신경을 쓰질 않는 듯이 보였고, 오늘도 이렇게 생면부지의 상태에서 부딪쳐 넘어 졌는데도, 발딱 일어나 사과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서, 상대편의 앞섶 지퍼 열린 걸 지적하는 엉뚱함.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
‘괜찮니?’
난 그제서야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너 안경 썼다? 공부는 디지게 안 하면서 안경은…..’
나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중학교 때로 멎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니 뿔테 안경은 여전하네. 근데, 키는 아직도 크고 있냐?’
그녀는 멍한 얼굴과 달리 체격은 풍성한 구석이 있었는데, 그건 글래머 라든가 섹쉬, 뭐 이런 표현을 했어야 했는데, 그녀에 대한 나의 기억도, 중학교 때로 멎어 있어서 인지, 그런 찬사가 쉽사리 따라 나오지는 않고 있었다.
‘죄다 명품이네? 너 잘 사는 모양이다?’
‘뭐, 그렇게 까지야….우리 파출부 아줌마 딸이 결혼 하는데, 옷이 없다잖아, 그래서 내가 혼수 겸해서 사주는 거지 뭐.’
그녀는 마음 씀씀이가 넓고 자상한 점은, 아직도 기억에 있었다. 학교 근처에 돌아 다니던 미친갱이 에게도, 언제나 잘 아는 사람처럼 얘기를 거는 건 그녀뿐 이었다. 가끔 자기가 먹고 있던 쮸쮸바도 건네주고, 장난 삼아 자신의 가방을, 그 녀석에게 지워서 쫄면하우스까지 행차를 하던 때도 있었다. 우리들이 녀석이라고 부르기는 했어도, 그 사람은 거의 어른 이었는데, 하는 짓거리는 꼭 국민학생 같았다. 등 하교 하는 중학생 앞을 스쳐 지나가면서, 아직 물이 오르지도 않은 여자 애들의 엉덩이를 때리고 토끼거나, 아이스께끼를 일삼고 달아 났지만, 애들은 미친 것을 알고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었다. 사람들 말로는 아주 공부를 잘하던 대학생 이었는데, 무슨 이유였는지 미쳐버려, 그렇게 학교 주변을 배회하고 산다는 그가, 아무런 해코지 없이 대해주는 아이는 그녀가 유일했다. 그녀는 마음이 여렸던 걸로 기억된다. 국어 시간에 낭랑한 목소리로 시조를 읊어가면서 설명하시는 틈에,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명희, 손명희! 왜 그러나? 이 시조가 그리도 감동적이었나?’
‘아뇨!.......그게 아니고….’
‘그럼?’
‘경선이가 불쌍해서…..’
‘너 이 시간에 딴 짓하며, 만화책 읽고 있었냐?’
그러나, 그녀는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선생님이 있건 말건 돌아서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그녀의 울음에, 애들도 의아해 하며, 창 밖을 내다 보았지만, 딱히 무엇을 보아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천천히 가리켜, 비가 억수로 퍼붓고 있는 창 밖을 가리켰다. 아이들은 그제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가 가리킨 것은 그 동네의 유명한 미친갱이 였다. 아무도 알지 못했던 그 사람의 이름까지도 알고 있었던 그녀……그 사람은 소리를 있는 대로 지르면서, 교문 밖에서 마구 뛰어 다니고 있었다. 한 손에는 그 폭우 중에 펴지도 않은 우산을 들고서….
‘근데, 뭐? 뭐 잘못 된 거라도 있냐?’
선생님께서는 잘 모르고 계셨고,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나는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는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그렇게 우산을 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녀를 기다렸다는 거였다. 그녀에게 친절히 우산을 씌워 주기에, 그는 너무 미쳐 있었고, 그저 우산을 본능적으로 들고 나와서, 설사 옆에 같이 가더라도 손에만 쥐고서 씌워주지 못한 채, 홈빡 비를 맞고 가는, 미쳤다는 그 사람…..그녀는 그의 마음 씀씀이와 닫힌 창문 틈새로 들리는, 의미도 알 수 없는 그의 울부짖음에, 눈물을 쏟아낸 것이었다.
‘결혼했니?’
‘응, 한번….’
‘나 이런, 그럼 여러 번 하는 사람도 있냐?’
‘또 하게 되면, 한번은 넘어선 거니까 여러 번의 축에 속하는 거 아니니?’
엉뚱하긴 해도, 듣고 보면 이치가 그럴싸하게 들어맞는 얘기를 잘도 하던 그녀.
‘선생님!’
‘왜?’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도, 사회생활을 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나여?’
‘글쎄, 어떤 문제 인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들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법과 규제의 테두리에 걸려 종국에는 교정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게 되거나, 병원 행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가정과 사회, 학교의 교육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럼 원칙을 무시하는 것도, 근본이 문제가 있는 건가여?’
‘당연하지. 원칙도 중요하고, 상식은 특히나 중요하지. 상식 선에서 생각하자, 이런 말도 있잖니?’
‘아! 그렇구나. 근데여….., 철구가 문제가 있는 거 같아여.’
‘왜?’
‘도시락은 점심시간에 먹으라는 원칙 아녀여? 근데 아까부터 계속 선생님 몰래 도시락 까쳐먹고 있거덩여. 이거 원칙도, 상식도 무시한 거 아녜여? 그져?’
이런 뉘기미…..난 그날 뻔뻔스럽게, 그것도 겁도 없이, 수업 시간에 도시락 까먹다가, 그녀의 고자질에 걸려, 선생님께 훈육실로 끌려가 맞아 뒤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지적은 상황을 무마하려고 나를 끌어들인 것이었고, 그 질문의 의미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철구, 너 멋있어 졌다. 이젠 코 안 파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팠으면, 아마 터널도 그런 터널이 없을 텐데….’
‘야, 일년 내내 코 후비는 인간이 어디 있냐?’
‘왜 없어? 너 있잖아? 그리고, 나 아직도 기억 나는데, 너 손톱도 물었지? 그것도 이빨로 물은 손톱 찌끄래기 잘도 먹대…..하긴 그것도 누가 그러든데, 단백질이랑, 칼슘 덩어리라고 하긴 하대.’
세세한 걸 잘도 기억해 내는 그녀. 머리 하나는…..그녀는 무척 공부를 잘했다. 친구도 없고, 엉뚱한 짓만 해대는 그녀가, 공부하는 재주라도 없으면, 어찌 하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들께서도 그녀의 돌출적인 행동을 그리 미워하지는 않으셨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만이 누렸던 그런 특권이랄까? 내가 그녀와 가까워 졌던 것은, 다름아닌 그녀의 잠버릇 때문이었다.
‘얘, 너 왠 일이니? 발은 또 왜?’
등교를 하면서, 그녀는 부유하던 집안답게 운전 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다리에 깁스를 하고 등교한 것이었다. 그 당시, 키가 좀 작았던 나는, 맨 앞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고, 따로이 책상을 두고 앉은 그녀와 가깝게 생활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당삼, 담임은 범생이 였던 그녀를 보호하라는 엄명을, 가장 가까이 앉은 나에게 내렸고, 난 그 날로부터 본의와는 전혀 틀리게, 그녀의 가방모찌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멍희, 너 또 어디서 멍청한 짓 하다가 다쳤냐?’
‘딴 사람에게 말 안하면…..’
출석번호는 틀렸지만, 우격다짐으로 주번을 같이 하게 된 이유로, 체육 시간, 교실을 지키고 있던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어서 얘기해 봐.’
‘그게, 그러니까….내가 찼어.’
‘니가 뭘?’
‘내가 찼다니까? 내 발로.’
‘엥?’
그녀는 몸부림을 치며, 잠을 자는 통에, 자신이 돌려 찬 다리가 침대 모서리에 정통으로 부딪치면서 금이 쩍하고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서도 모르고 잠을 잤다는 그녀…..아침이 되어 다리가 뚱뚱 붓고, 온 몸에 식은 땀이 솟아 그제서야 알아차렸다는 그녀의 민한 감각….
‘이제 침대는 안 걷어 차니?’
‘내가 나이가 몇인데….’
그녀가 웃었다. 학교 다닐 때도 그랬지만, 난 속으로 그 뷩신처럼 보이는 안경 쫌 제발 벗어보지 라며 생각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음을 기억해 냈다.
‘그 안경, 스타일 바꿀 때 안 됐니?’
‘왜? 이게 어때서? 이래 보여도 명품이야.’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녀의 얼굴에 걸린 그 안경은 그녀를 멍희로 만들기에 일조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내 예전 기억 때문 인지는 몰라도……
‘철구, 넌 결혼 했냐?’
‘아니…..’
‘왜? 너 혹시….. 남자가 여자보다 더 좋니?’
이런, 닝기리!, 허는 얘기 하고는…
‘남자들 뭐 다 그렇지. 학교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오고, 직장 잡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그러다 보면 이 나이 되는 거 금방이야. 여자야 틀리지.’
‘그랬구나……목 탄다…얘.’
‘뭐 쫌 마시러 갈래?’
그러나, 그녀와 같이 들어간 곳은 근처 호텔의 스텐드 바였다. 그녀는 지하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쇼핑 본 것을 맡기고, 서둘러 나를 끌다시피 하며 들어서서 한 낮에, 그것도 벌건 대낮에,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시키는 것이었다.
‘너도 마실래?’
‘아니, 대낮에 왠 술?’
‘나, 술 기운이 떨어지면 꼭 이래.’
‘너 술 마시니?’
‘응. 소주는 목이 울컥거려서 못 들이켜도 양주는 잘 넘어가.’
‘혹시….., 알코올 중독?’
‘응…..고치려고 몇 번 애썼는데, 그만 뒀어. 이기 무신 다이어트도 아니고, 이래 살다 죽을라고….’
‘야, 그래도 그렇지, 젊은 나이에 알코올중독은 그래도 쫌….’
그녀의 성장환경이나, 학벌, 지금의 하고 다니는 폼새로 보아, 알코올 중독과는 심하게 거리가 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사실을 숨김없이 나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혼 때문에 그러니?’
‘이혼 아냐…… 먼저 보냈어. 그 덕에 이렇게 혼자서 주구장창 잘 살긴 하지만…..’
‘그랬구나.’
난 그 간의 사정이 조금은 짐작되긴 했다. 가문끼리 이루어지는 혼사 였을 테고, 그녀는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왔을 것이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그녀는 그 충격에서 헤어나기 어려워 술에 손을 댔고, 아직 중독의 굴레를 벗질 못하는 그런 스토리의 연상….
‘무슨 일로…사고 였니?’
‘아니, 제 발로 죽었어. 사랑한다던 여자랑 같이….참 어이 없더라. 보호자라고 불려가서 호텔방에 들어 갔는데, 뻐덩뻐덩 하게 굳어버린 두 사람의 알몸 시체를 뜯어 내는데, 마지막까지, 그 물건 이라는 게 제일로 속 썩인 거 아니? 경찰 말로는 삽입된 채로 저렇게 복상사 스타일로 죽으면, 여자의 경도 안이 진공처럼 빨아 들여서, 나중에 물건을 뽑아 낼 때는 꼭 샴페인 따는 소리가 난대.’
너무나 담담히 자신의 얘기를 하는 그녀의 얼굴 위로, 그녀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파랗게 내려 앉고 있었다.
‘어쩌다가?’
‘무척 좋았나 보지. 나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좋아하던 사인데, 그럴 수 있었을 거야. 나야 뭐, 커튼처럼 그 사람의 장식품이었을 뿐인데 뭐. 겉에 보면 화려하기 이를 데 없고, 가끔 스치고 지나가다 만져주고, 때 되면 걷어주고, 가끔 깨끗하게 빨아 주기도 하는, 뭐 그런…..’
그녀의 비유는 날카로웠다. 나도 술을 시키기 않을 수 없었다. 나 보다 두 배는 빠르게 들이키는 그녀와 보조를 맞출 수는 없었어도, 난 그녀를 보호해야 되질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면 이혼이라도 하지 그랬어?’
‘그게 그렇게 되질 않더라구. 맨 처음에 난 그 사람이 임포인 줄 알았어. 내가 빨고, 핥고, 별 짓을 다하고, 심지어는 혹시나 해서, 창녀처럼 굴어보기까지 했는데도 도대체 발기가 안 되는 거야. 그러다, 서로가 점점 지쳐 가더라구. 그냥 이렇게,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정상처럼 살아가는 거야….그런 생각이 들었지. 남들은 그랬을 거야. 문제가 있을 수가 없는 가정이라고 말이야. 그러나, 그 안에는 내 어린 시절처럼, 원칙도 없고, 상식도 무너진 걸 모르고서 말이지….그러다, 그의 손길은 점차 나에게서 뜸 해지기 시작했지. 난 그 사람이 바람이 나는 줄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건 바람이 아니라, 중간에 불청객처럼 끼어든 나로부터 돌아서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거였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지. 바보같이……’
‘원래의 자리라니?’
‘응…..자기 누나….’
난 술을 먹다가 목에 콱 걸리고 말았다.
‘누나? 친 누나?’
‘응……나를 사랑하기는 했지. 종류가 다르기는 했지만…..참 차분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어. 죽는 그 날까지도, 나에게는 더 없이 친절하고, 자신의 성적 한계에 대해서, 나에게 얼마나 미안해 하던지…..누나 앞에서만 미친 듯이 뿜어대는, 자신의 변태적인 성욕을 증오하면서도……. 그걸 뿌리치지도, 잊지도 못하던 그 사람이 불쌍하기까지 했다면 믿겠니?...... 요즘은 모텔에 드나드는 남녀들이 그렇게 당당하다며? 그 사람은 너무나 부끄러워했어. 결코 누구도 인정할 수 없고, 상식으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관계를 말이야. 모순 중에도 그런 모순이 없었는데…..결국 그 두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좁았다고 할 수 있지. 무얼 더 할 수 있었겠어? 세월이 흘러 사그라 들기를? 아님, 내가 인정해 주기를? 그렇게 되었더라도, 그 두 사람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평생 짐을 지고 살아가기가 두려웠던 거야. 가장 치사하면서도, 멍청하긴 해도, 죽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었었나 봐.’
그녀의 혀가 조금씩 풀려가고 있었다. 어느새 훌쩍 자라버려, 세상의 고뇌를 이미 졸업한 듯한, 그녀의 얘기 속에서, 난 그녀에 대한 기억들을, 하나하나 종이 학처럼 접어서, 마음속 저 깊은 곳으로 천천히 가라 앉히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지금은 뭐?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 땜질 하면서 사는 거지. 울적하면 마시고, 허기지면 마시고, 잠이 안 와도 마시고, 똥이라도 누어 보려고 또 한잔…..술을 끊으면 왜 똥이 안 나올까? 정말 짜증 난다니깐!....난 사실 TV가 제일 미워.’
‘얜 또 무신 봉창 뚜드리는 소리? TV가 밉긴 왜 미워? 너 아직도 여전 하구나?’
‘술 쫌 줄여 보려고 하면, 그예 걸직한 안주 발에, 소주잔 턱 하니 걸치는 장면이, 줄줄이 채널마다 나오질 않나, 참…..미치겠드라. 나 얼마 전에는 병원에 실려가서 위세척도 했었다?’
‘왜?’
‘그 영화 있잖아?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라는 거….’
‘근데, 왜?’
‘하도 울적해서 집에 있는 양주란 양주를 모두 양푼에 때려 넣고, 미친 년처럼 벌컥벌컥 들아켰지 뭐니? 평소에 제일 해보고 싶었던 거거덩. 쭈욱 들이키고, 양푼을 내려 놨는데, 그때부터 기억이 없드라구. 그렇게 되어, 쪼금만 늦으면, 쇼크로 죽기도 한다고 하드라구. 나 웃기지?’
예전부터 웃겼던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철구, 너 안경까지 쓰니까, 생전의 우리 그이랑 너무 닮은 거 있지? 너 여자 친구라도 있냐?"
‘응.’
‘결혼할 사이?’
‘아직은….’
‘그럼 엔조이?’
‘그건 쫌 아니고…..생각 중이야. 내가 가진 게 없잖아? 전세 꺼리 라도 있어야 어디 명함이나 내밀어 보지.’
‘어릴 때부터 그렇게 갈구고, 괴롭혔는데, 내가 안 밉디?’
‘그게 괴롭힌 거냐? 다 장난 이었는데 뭘….’
‘사실, 그때부터 너만 보면, 자꾸 친해지고 싶었어. 사실 말이지….’
‘우리 친하지 않았나? 다들 우리 보고 사귀냐고 했었잖아?’
‘그러긴 했지. 나에 대해서도 누구 보담 잘 알고 있었고….아! 옛날 생각 난다. 그때, 우리 정말 철 없었는데…..기억나니? 경선이 아저씨….우리들이 미친갱이 라고 불렀던….참 불쌍한 아저씨 였는데…..’
‘그 얘긴 또 왜?’
‘그 아저씨 왜 미쳤는지 아니?’
‘아니, 나에게 그런 얘기 한 적 있었나?’
‘아닐 꺼야. 나도 지금 처음 얘기하는 거니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대. 어느 날, 자기랑 같이 걸어 가다가 차도로 그냥 뛰어 들었대. 그 날이 바로 청혼한 날이었다는데….왜 뛰어 들었냐구? 자신을 믿고 따르는 경선이 아저씨를 더 이상 속일 수 없었다지 아마?’
‘뭘 속여?’
‘그녀는 아저씨에게서 플라토닉한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변태적이고, 퇴폐적인 에로스를 동시에 즐기고 있었고…... 그러던 그 여자가 아저씨의 순수한 청혼을 받아 든 순간, 밀려오는 죄책감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선택했던 가 봐. 아저씨는 나중에사 사실을 알고서 정신을 놓았다고, 문방구 아주머니께서 그러셨어. 세상, 참….왜 세상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소유할 수 없게시리, 하지 마라 라는 거미줄을 사방에 쳐놓았을까?’
‘너 많이 취했다. 그만 마시지…..’
‘왜, 내가 보기 흉하니? 그런 거야?’
그녀가 나를 풀린 눈으로 쳐다보며, 코 밑까지 흘러 내린, 그 뿔테 안경을 벗었다. 난 그제서야 그녀의 눈이 그 멍청해 보이는 안경 속에서, 그 두껍던 안경알의 돗수 속에서도 아름답게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원래 눈 안 나뻐. 양 쪽 다 2.0인 거, 너도 몰랐지?’
‘그런데, 왜 안경은 끼고 살았니?’
‘그래야 더 멍청해 보이잖아!’
그녀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밖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자신의 멍청한 모습을 스스로 연출하며, 불편함과 어지러움이 동반된 똥글뱅이 돗수 높은 안경에다, 좇 같은 디자인의 뿔테 안경을 기어이 걸고 살아왔던 그녀……
‘이제 그만 할 때도 됐잖아?’
‘그런가?’
‘세상사 별 거 있어? 그냥 그렇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거지.’
‘우습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넌 그때, 내가 울면서 하는 얘기를 다 듣고도, 지금과 똑 같은 얘기로 나를 위로 한 거 알아?’
‘내가 그랬나?’
‘응. 너무 어른 스럽게….그때는 내 키가 더 커서, 누나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컸다니?’
‘남자들은 여자보다 늦어….항상은 아니지만….내가 바래다 줄까?’
‘그래 주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니 애인이 볼라! 나 같은 과부댁 만나고 다닌다고, 너 M아 씌우면 어쩔래?’
‘어쩌긴, 동창인데, 열나 섹쉬 해서, 안 만날 수가 없었다고 뻥치지 뭐.’
‘그럴 용기도 없어 뵈는데? 내 말이 맞쥐? 넌 그때나 지금이나 나보다 용기가 없잖아?’
‘하긴…..넌 용감해. 아직도…..’
난 그녀의 호탕함이, 대범함이 그 쪼잔한 안경에 걸려 있었어도 알 만한 사람은 알 수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럴까? 아니! 모를 거야. 네가 유일하게 나의 얘기를 들어준 친구였어. 아무도 짐작 못 하더라구. 어! 어지럽다….이제 그만 마실란다. 핸폰으로 우리 아찌 좀 불러줄래? 참! 니 명함이나 한 장 주라.’
난 그녀의 핸폰을 열고, 그녀가 가르쳐 주는 예약버튼을 눌러 그녀의 운전기사를 호출했다. 얼마 있질 않아, 아까 지하 주차장에서 본 거의 할아버지에 가깝던 그 기사가 호텔로 그녀를 데리러 들어왔다.
‘아가씨, 많이 취하셨네요. 어여 가시죠.’
‘아찌….아찌….이 사람 기억 나? 나 중학교 때, 다리 다쳐서 줄창, 가방 들어 주던 애 잖아?’
‘아! 그러세요? 반갑습니다. 아까는 몰라 뵙고….’
‘괜찮습니다. 명희가 많이 취했네요. 제가 말렸는데도, 어찌나 빠르게 들이키던지…..’
‘그래도 오늘은 전화라도 해서 다행 이네요. 하도 이곳 저곳에서 쓰러지셔서, 항상 맘이 놓이질 않죠. 그렇다고 이 늙은 얼굴로 다 따라 다닐 수도 없고서리…..’
그는 그녀가 시집 가기 전부터 그녀를 모시던 기사 아저씨 였다. 나도 허옇게 변해 버린 그분의 머리칼과 얼굴의 주름으로 인해, 알아보지 못했기는 마찬가지 였고……
‘잘 가라, 명희야!, 몸 조심하고….술 쫌 작작 퍼! 니가 무신 술상무도 아니고설랑….’
‘자, 여기! 오랜만에 만나서 줄 껀 없고…..자, 여기 술잔…..기념으로 줄께. 또 볼 일 있겠니? 너도 살아가기 바쁘고, 나도 그럴테고…그래도 기념으로 간직해. 내 이쁜 입술이랑, 루즈 자국 보이지? 혹시 아니? 내가 죽은 후에 그게 비싼 값에 팔릴지? 안녕, 잘 살아!’
‘지가 무신 마릴린 몬론 줄 안다니깐. 어여 가! 늦었다.’
대낮부터 마신 술이 한밤중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가고,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서, 그녀가 주고 간 술잔을 바라다 보고 있었다. 담배를 피워 물고 살펴보면서, 나는 그 루즈 자국이 너무 아름답다는, 지극히 매혹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술잔을 내려다 보면서, 그녀나, 나나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었고, 상식도, 도덕도 사라진, 비슷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것으로 인해, 그 술잔은 더욱 의미 있게, 내 손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세상은 그렇게 상식으로 무장된, 이른바 바른 생활을 위한 대다수를 위해 도도히 굴러갈 것이다. 부친의 불거진 좇대가리가 여린 그녀의 보지를 갈갈이 찢어 놓으면서도, 울음을 참아가며, 엎드려 영어 단어를 외워야 했으며, 그 치 떨리던 섹스의 수치심을 잠시라도 면해 보려고, 지 스스로 침대에 다리를 날려야 했던 그녀나, 작은 체구였지만 유달리 조숙하고, 건실했던 좇대를 갖고 있었다는 이유 때문 인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목욕을, 잠자리를 같이해야 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나나 별반 다를 바는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 어린 나이에도 나에게 먼저 입을 연 그녀의 용기를 난 흉내 낼 수조차 없었다. 난 그녀의 말대로 겁쟁이인지 모른다.
-끝-
‘꽈당……에구구’
백화점의 인파 사이에서 난 잠시 뒤를 돌아다 보다가, 누군가와 부딪쳐 뒤로 발라당 까지고 말았다.
‘앗, 띠발, 뉘기야…앞 쫌 제대로 보고….’
‘근데…..아자씨, 바지 앞이 열렸는데….’
‘엥?’
난 먼저 일어나 무슨 소리라도 하려다가, 기냥 놀라 고개를 구부려 바지를 살폈다. 이런, 망신, 개망신이 있나? 그제서야 나는 바지 앞섶의 지퍼를 올리면서, 송구스러운 듯이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데라도…’
‘어? 너 혹시, 철구?’
‘어라? 너 명희?’
그녀는 중학교 동창 명희 였다. 손명희……양 손 가득히 명품을 쇼핑한 듯 보이는 그녀……중학교 때처럼, 그 놈의 돗수 높은, 엿 같은 뿔테 안경은 아직 쓰고 있었다. 그 굵기만 쫌 얇아 졌을 뿐, 그 요상하고, 멍청틱한 모습은 여전했다. 하긴, 그 때 당시, 별명이 멍희 였으니……왜냐구? 그 당시, 명희는 그야말로 나이로 봐서, 푼수의 별명을 붙이기에는 너무 어려, 친구들 사이에서 그녀는 멍청한 명희로 통하다가, 그냥 멍희로 바뀐 때문이었다. 멀뚱한 키에다, 눈도 오지그리 나쁜지, 앉은 키가 절나 큰대도 불구하고, 허리를 꾸부정하게 구부리고, 맨 앞자리 구석에 책걸상을 따로 놓고 앉았던 멍희…..그녀의 무릎은 언제나 까져서 그랬는지, 아니면 무엇 때문 이었는지, 반창고가 떨어질 새가 없었고, 공부 시간 이든, 쉬는 시간 이든 간에 그녀로 인해 발생하는 해프닝은 과히 백과사전 감 이었다.
‘Why? MyungHee, Any Question?(왜, 명희양, 무슨 질문 이락두)’
그 당시, 드물게 파란 눈의 선생이 영어를 가리키던 시절, 공부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난 그녀.
‘Yes, I have. He does not study now! ChulGu is now picking his nose hardly!(네, 있는 데여, 철구가 지금 공부 열나 안하고, 딴 짓하고 있걸랑여. 디리 코꾸녕 파고 있다니깐여!)’
나 이런! 지나 잘할 것이지, 그녀는 내가 공부를 하든지 말든지, 상관할 일이 아니었는데도, 내가 코만 파고 있는 것처럼 고자질을 한 것이었다. 그것도 영어로….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뒤에 앉은 사람이, 그녀의 앉은 키가 너무 큰 관계로, 하도 지분대는 바람에, 허리를 구부리고 수업을 받는 것이 도저히 고통스럽다며, 스스로 책걸상을 교탁 옆으로 놔 둔 것 까지는 좋았는데, 언제나 하루에 한번은 아이들을 까르르 돌아가시게 하던 그녀 였다.
‘깔깔깔…..’
교실 안이 갑자기 쏟아지는 웃음으로 칠판에 수업 내용을 적어 내려 가시던 선생님께서, 획하고 돌아다 보시며,
‘조용히 적을 것이지, 뭔 말들이 이렇게 많아?’
그러나, 선생님의 눈 앞에는, 책상을 들고 엉거주춤한 몸짓으로, 거북이처럼 창가 쪽에서 교탁을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명희, 너 왜 그러냐?’
‘햇볕이 너무 따가와 디질 것 같아서….’
그러고 말 멍희가 아니었다.
‘선생님은 마저 쓰세여, 전 제 갈길, 갈께여.’
아이들이 자빠졌다. 그녀는 굳건하게 그 똥싸는 폼으로 일체형 책상을 끌고, 입구 쪽으로 책상을 끌고 전진했다. 표정도 없었고, 자신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표정이었던 그녀…..그녀의 이사는 햇볕이 쏟아지던 오전에 한번, 해가 넘어간 오후에도 한 번 있었다. 왜냐구?
‘명희, 너 왜 그러는데?’
‘등짝이 시려워서….선생님은 마저 쓰세여, 전 제 갈길 갈께여.’
그렇게 소문이 난 그녀를, 선생님들께서는 그냥 놔 두셨다. 악의도 없었을뿐더러, 누구에게 주목 받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 듯싶다. 그녀는 그렇게 돌출적인 행동을 일삼았지만, 본인은 별로 그것에 신경을 쓰질 않는 듯이 보였고, 오늘도 이렇게 생면부지의 상태에서 부딪쳐 넘어 졌는데도, 발딱 일어나 사과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서, 상대편의 앞섶 지퍼 열린 걸 지적하는 엉뚱함.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
‘괜찮니?’
난 그제서야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너 안경 썼다? 공부는 디지게 안 하면서 안경은…..’
나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중학교 때로 멎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니 뿔테 안경은 여전하네. 근데, 키는 아직도 크고 있냐?’
그녀는 멍한 얼굴과 달리 체격은 풍성한 구석이 있었는데, 그건 글래머 라든가 섹쉬, 뭐 이런 표현을 했어야 했는데, 그녀에 대한 나의 기억도, 중학교 때로 멎어 있어서 인지, 그런 찬사가 쉽사리 따라 나오지는 않고 있었다.
‘죄다 명품이네? 너 잘 사는 모양이다?’
‘뭐, 그렇게 까지야….우리 파출부 아줌마 딸이 결혼 하는데, 옷이 없다잖아, 그래서 내가 혼수 겸해서 사주는 거지 뭐.’
그녀는 마음 씀씀이가 넓고 자상한 점은, 아직도 기억에 있었다. 학교 근처에 돌아 다니던 미친갱이 에게도, 언제나 잘 아는 사람처럼 얘기를 거는 건 그녀뿐 이었다. 가끔 자기가 먹고 있던 쮸쮸바도 건네주고, 장난 삼아 자신의 가방을, 그 녀석에게 지워서 쫄면하우스까지 행차를 하던 때도 있었다. 우리들이 녀석이라고 부르기는 했어도, 그 사람은 거의 어른 이었는데, 하는 짓거리는 꼭 국민학생 같았다. 등 하교 하는 중학생 앞을 스쳐 지나가면서, 아직 물이 오르지도 않은 여자 애들의 엉덩이를 때리고 토끼거나, 아이스께끼를 일삼고 달아 났지만, 애들은 미친 것을 알고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었다. 사람들 말로는 아주 공부를 잘하던 대학생 이었는데, 무슨 이유였는지 미쳐버려, 그렇게 학교 주변을 배회하고 산다는 그가, 아무런 해코지 없이 대해주는 아이는 그녀가 유일했다. 그녀는 마음이 여렸던 걸로 기억된다. 국어 시간에 낭랑한 목소리로 시조를 읊어가면서 설명하시는 틈에,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명희, 손명희! 왜 그러나? 이 시조가 그리도 감동적이었나?’
‘아뇨!.......그게 아니고….’
‘그럼?’
‘경선이가 불쌍해서…..’
‘너 이 시간에 딴 짓하며, 만화책 읽고 있었냐?’
그러나, 그녀는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선생님이 있건 말건 돌아서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그녀의 울음에, 애들도 의아해 하며, 창 밖을 내다 보았지만, 딱히 무엇을 보아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천천히 가리켜, 비가 억수로 퍼붓고 있는 창 밖을 가리켰다. 아이들은 그제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가 가리킨 것은 그 동네의 유명한 미친갱이 였다. 아무도 알지 못했던 그 사람의 이름까지도 알고 있었던 그녀……그 사람은 소리를 있는 대로 지르면서, 교문 밖에서 마구 뛰어 다니고 있었다. 한 손에는 그 폭우 중에 펴지도 않은 우산을 들고서….
‘근데, 뭐? 뭐 잘못 된 거라도 있냐?’
선생님께서는 잘 모르고 계셨고,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나는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는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그렇게 우산을 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녀를 기다렸다는 거였다. 그녀에게 친절히 우산을 씌워 주기에, 그는 너무 미쳐 있었고, 그저 우산을 본능적으로 들고 나와서, 설사 옆에 같이 가더라도 손에만 쥐고서 씌워주지 못한 채, 홈빡 비를 맞고 가는, 미쳤다는 그 사람…..그녀는 그의 마음 씀씀이와 닫힌 창문 틈새로 들리는, 의미도 알 수 없는 그의 울부짖음에, 눈물을 쏟아낸 것이었다.
‘결혼했니?’
‘응, 한번….’
‘나 이런, 그럼 여러 번 하는 사람도 있냐?’
‘또 하게 되면, 한번은 넘어선 거니까 여러 번의 축에 속하는 거 아니니?’
엉뚱하긴 해도, 듣고 보면 이치가 그럴싸하게 들어맞는 얘기를 잘도 하던 그녀.
‘선생님!’
‘왜?’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도, 사회생활을 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나여?’
‘글쎄, 어떤 문제 인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들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법과 규제의 테두리에 걸려 종국에는 교정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게 되거나, 병원 행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가정과 사회, 학교의 교육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럼 원칙을 무시하는 것도, 근본이 문제가 있는 건가여?’
‘당연하지. 원칙도 중요하고, 상식은 특히나 중요하지. 상식 선에서 생각하자, 이런 말도 있잖니?’
‘아! 그렇구나. 근데여….., 철구가 문제가 있는 거 같아여.’
‘왜?’
‘도시락은 점심시간에 먹으라는 원칙 아녀여? 근데 아까부터 계속 선생님 몰래 도시락 까쳐먹고 있거덩여. 이거 원칙도, 상식도 무시한 거 아녜여? 그져?’
이런 뉘기미…..난 그날 뻔뻔스럽게, 그것도 겁도 없이, 수업 시간에 도시락 까먹다가, 그녀의 고자질에 걸려, 선생님께 훈육실로 끌려가 맞아 뒤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지적은 상황을 무마하려고 나를 끌어들인 것이었고, 그 질문의 의미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철구, 너 멋있어 졌다. 이젠 코 안 파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팠으면, 아마 터널도 그런 터널이 없을 텐데….’
‘야, 일년 내내 코 후비는 인간이 어디 있냐?’
‘왜 없어? 너 있잖아? 그리고, 나 아직도 기억 나는데, 너 손톱도 물었지? 그것도 이빨로 물은 손톱 찌끄래기 잘도 먹대…..하긴 그것도 누가 그러든데, 단백질이랑, 칼슘 덩어리라고 하긴 하대.’
세세한 걸 잘도 기억해 내는 그녀. 머리 하나는…..그녀는 무척 공부를 잘했다. 친구도 없고, 엉뚱한 짓만 해대는 그녀가, 공부하는 재주라도 없으면, 어찌 하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들께서도 그녀의 돌출적인 행동을 그리 미워하지는 않으셨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만이 누렸던 그런 특권이랄까? 내가 그녀와 가까워 졌던 것은, 다름아닌 그녀의 잠버릇 때문이었다.
‘얘, 너 왠 일이니? 발은 또 왜?’
등교를 하면서, 그녀는 부유하던 집안답게 운전 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다리에 깁스를 하고 등교한 것이었다. 그 당시, 키가 좀 작았던 나는, 맨 앞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고, 따로이 책상을 두고 앉은 그녀와 가깝게 생활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당삼, 담임은 범생이 였던 그녀를 보호하라는 엄명을, 가장 가까이 앉은 나에게 내렸고, 난 그 날로부터 본의와는 전혀 틀리게, 그녀의 가방모찌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멍희, 너 또 어디서 멍청한 짓 하다가 다쳤냐?’
‘딴 사람에게 말 안하면…..’
출석번호는 틀렸지만, 우격다짐으로 주번을 같이 하게 된 이유로, 체육 시간, 교실을 지키고 있던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어서 얘기해 봐.’
‘그게, 그러니까….내가 찼어.’
‘니가 뭘?’
‘내가 찼다니까? 내 발로.’
‘엥?’
그녀는 몸부림을 치며, 잠을 자는 통에, 자신이 돌려 찬 다리가 침대 모서리에 정통으로 부딪치면서 금이 쩍하고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서도 모르고 잠을 잤다는 그녀…..아침이 되어 다리가 뚱뚱 붓고, 온 몸에 식은 땀이 솟아 그제서야 알아차렸다는 그녀의 민한 감각….
‘이제 침대는 안 걷어 차니?’
‘내가 나이가 몇인데….’
그녀가 웃었다. 학교 다닐 때도 그랬지만, 난 속으로 그 뷩신처럼 보이는 안경 쫌 제발 벗어보지 라며 생각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음을 기억해 냈다.
‘그 안경, 스타일 바꿀 때 안 됐니?’
‘왜? 이게 어때서? 이래 보여도 명품이야.’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녀의 얼굴에 걸린 그 안경은 그녀를 멍희로 만들기에 일조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내 예전 기억 때문 인지는 몰라도……
‘철구, 넌 결혼 했냐?’
‘아니…..’
‘왜? 너 혹시….. 남자가 여자보다 더 좋니?’
이런, 닝기리!, 허는 얘기 하고는…
‘남자들 뭐 다 그렇지. 학교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오고, 직장 잡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그러다 보면 이 나이 되는 거 금방이야. 여자야 틀리지.’
‘그랬구나……목 탄다…얘.’
‘뭐 쫌 마시러 갈래?’
그러나, 그녀와 같이 들어간 곳은 근처 호텔의 스텐드 바였다. 그녀는 지하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쇼핑 본 것을 맡기고, 서둘러 나를 끌다시피 하며 들어서서 한 낮에, 그것도 벌건 대낮에,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시키는 것이었다.
‘너도 마실래?’
‘아니, 대낮에 왠 술?’
‘나, 술 기운이 떨어지면 꼭 이래.’
‘너 술 마시니?’
‘응. 소주는 목이 울컥거려서 못 들이켜도 양주는 잘 넘어가.’
‘혹시….., 알코올 중독?’
‘응…..고치려고 몇 번 애썼는데, 그만 뒀어. 이기 무신 다이어트도 아니고, 이래 살다 죽을라고….’
‘야, 그래도 그렇지, 젊은 나이에 알코올중독은 그래도 쫌….’
그녀의 성장환경이나, 학벌, 지금의 하고 다니는 폼새로 보아, 알코올 중독과는 심하게 거리가 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사실을 숨김없이 나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혼 때문에 그러니?’
‘이혼 아냐…… 먼저 보냈어. 그 덕에 이렇게 혼자서 주구장창 잘 살긴 하지만…..’
‘그랬구나.’
난 그 간의 사정이 조금은 짐작되긴 했다. 가문끼리 이루어지는 혼사 였을 테고, 그녀는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왔을 것이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그녀는 그 충격에서 헤어나기 어려워 술에 손을 댔고, 아직 중독의 굴레를 벗질 못하는 그런 스토리의 연상….
‘무슨 일로…사고 였니?’
‘아니, 제 발로 죽었어. 사랑한다던 여자랑 같이….참 어이 없더라. 보호자라고 불려가서 호텔방에 들어 갔는데, 뻐덩뻐덩 하게 굳어버린 두 사람의 알몸 시체를 뜯어 내는데, 마지막까지, 그 물건 이라는 게 제일로 속 썩인 거 아니? 경찰 말로는 삽입된 채로 저렇게 복상사 스타일로 죽으면, 여자의 경도 안이 진공처럼 빨아 들여서, 나중에 물건을 뽑아 낼 때는 꼭 샴페인 따는 소리가 난대.’
너무나 담담히 자신의 얘기를 하는 그녀의 얼굴 위로, 그녀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파랗게 내려 앉고 있었다.
‘어쩌다가?’
‘무척 좋았나 보지. 나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좋아하던 사인데, 그럴 수 있었을 거야. 나야 뭐, 커튼처럼 그 사람의 장식품이었을 뿐인데 뭐. 겉에 보면 화려하기 이를 데 없고, 가끔 스치고 지나가다 만져주고, 때 되면 걷어주고, 가끔 깨끗하게 빨아 주기도 하는, 뭐 그런…..’
그녀의 비유는 날카로웠다. 나도 술을 시키기 않을 수 없었다. 나 보다 두 배는 빠르게 들이키는 그녀와 보조를 맞출 수는 없었어도, 난 그녀를 보호해야 되질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면 이혼이라도 하지 그랬어?’
‘그게 그렇게 되질 않더라구. 맨 처음에 난 그 사람이 임포인 줄 알았어. 내가 빨고, 핥고, 별 짓을 다하고, 심지어는 혹시나 해서, 창녀처럼 굴어보기까지 했는데도 도대체 발기가 안 되는 거야. 그러다, 서로가 점점 지쳐 가더라구. 그냥 이렇게,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정상처럼 살아가는 거야….그런 생각이 들었지. 남들은 그랬을 거야. 문제가 있을 수가 없는 가정이라고 말이야. 그러나, 그 안에는 내 어린 시절처럼, 원칙도 없고, 상식도 무너진 걸 모르고서 말이지….그러다, 그의 손길은 점차 나에게서 뜸 해지기 시작했지. 난 그 사람이 바람이 나는 줄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건 바람이 아니라, 중간에 불청객처럼 끼어든 나로부터 돌아서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거였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지. 바보같이……’
‘원래의 자리라니?’
‘응…..자기 누나….’
난 술을 먹다가 목에 콱 걸리고 말았다.
‘누나? 친 누나?’
‘응……나를 사랑하기는 했지. 종류가 다르기는 했지만…..참 차분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어. 죽는 그 날까지도, 나에게는 더 없이 친절하고, 자신의 성적 한계에 대해서, 나에게 얼마나 미안해 하던지…..누나 앞에서만 미친 듯이 뿜어대는, 자신의 변태적인 성욕을 증오하면서도……. 그걸 뿌리치지도, 잊지도 못하던 그 사람이 불쌍하기까지 했다면 믿겠니?...... 요즘은 모텔에 드나드는 남녀들이 그렇게 당당하다며? 그 사람은 너무나 부끄러워했어. 결코 누구도 인정할 수 없고, 상식으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관계를 말이야. 모순 중에도 그런 모순이 없었는데…..결국 그 두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좁았다고 할 수 있지. 무얼 더 할 수 있었겠어? 세월이 흘러 사그라 들기를? 아님, 내가 인정해 주기를? 그렇게 되었더라도, 그 두 사람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평생 짐을 지고 살아가기가 두려웠던 거야. 가장 치사하면서도, 멍청하긴 해도, 죽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었었나 봐.’
그녀의 혀가 조금씩 풀려가고 있었다. 어느새 훌쩍 자라버려, 세상의 고뇌를 이미 졸업한 듯한, 그녀의 얘기 속에서, 난 그녀에 대한 기억들을, 하나하나 종이 학처럼 접어서, 마음속 저 깊은 곳으로 천천히 가라 앉히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지금은 뭐?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 땜질 하면서 사는 거지. 울적하면 마시고, 허기지면 마시고, 잠이 안 와도 마시고, 똥이라도 누어 보려고 또 한잔…..술을 끊으면 왜 똥이 안 나올까? 정말 짜증 난다니깐!....난 사실 TV가 제일 미워.’
‘얜 또 무신 봉창 뚜드리는 소리? TV가 밉긴 왜 미워? 너 아직도 여전 하구나?’
‘술 쫌 줄여 보려고 하면, 그예 걸직한 안주 발에, 소주잔 턱 하니 걸치는 장면이, 줄줄이 채널마다 나오질 않나, 참…..미치겠드라. 나 얼마 전에는 병원에 실려가서 위세척도 했었다?’
‘왜?’
‘그 영화 있잖아?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라는 거….’
‘근데, 왜?’
‘하도 울적해서 집에 있는 양주란 양주를 모두 양푼에 때려 넣고, 미친 년처럼 벌컥벌컥 들아켰지 뭐니? 평소에 제일 해보고 싶었던 거거덩. 쭈욱 들이키고, 양푼을 내려 놨는데, 그때부터 기억이 없드라구. 그렇게 되어, 쪼금만 늦으면, 쇼크로 죽기도 한다고 하드라구. 나 웃기지?’
예전부터 웃겼던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철구, 너 안경까지 쓰니까, 생전의 우리 그이랑 너무 닮은 거 있지? 너 여자 친구라도 있냐?"
‘응.’
‘결혼할 사이?’
‘아직은….’
‘그럼 엔조이?’
‘그건 쫌 아니고…..생각 중이야. 내가 가진 게 없잖아? 전세 꺼리 라도 있어야 어디 명함이나 내밀어 보지.’
‘어릴 때부터 그렇게 갈구고, 괴롭혔는데, 내가 안 밉디?’
‘그게 괴롭힌 거냐? 다 장난 이었는데 뭘….’
‘사실, 그때부터 너만 보면, 자꾸 친해지고 싶었어. 사실 말이지….’
‘우리 친하지 않았나? 다들 우리 보고 사귀냐고 했었잖아?’
‘그러긴 했지. 나에 대해서도 누구 보담 잘 알고 있었고….아! 옛날 생각 난다. 그때, 우리 정말 철 없었는데…..기억나니? 경선이 아저씨….우리들이 미친갱이 라고 불렀던….참 불쌍한 아저씨 였는데…..’
‘그 얘긴 또 왜?’
‘그 아저씨 왜 미쳤는지 아니?’
‘아니, 나에게 그런 얘기 한 적 있었나?’
‘아닐 꺼야. 나도 지금 처음 얘기하는 거니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대. 어느 날, 자기랑 같이 걸어 가다가 차도로 그냥 뛰어 들었대. 그 날이 바로 청혼한 날이었다는데….왜 뛰어 들었냐구? 자신을 믿고 따르는 경선이 아저씨를 더 이상 속일 수 없었다지 아마?’
‘뭘 속여?’
‘그녀는 아저씨에게서 플라토닉한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변태적이고, 퇴폐적인 에로스를 동시에 즐기고 있었고…... 그러던 그 여자가 아저씨의 순수한 청혼을 받아 든 순간, 밀려오는 죄책감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선택했던 가 봐. 아저씨는 나중에사 사실을 알고서 정신을 놓았다고, 문방구 아주머니께서 그러셨어. 세상, 참….왜 세상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소유할 수 없게시리, 하지 마라 라는 거미줄을 사방에 쳐놓았을까?’
‘너 많이 취했다. 그만 마시지…..’
‘왜, 내가 보기 흉하니? 그런 거야?’
그녀가 나를 풀린 눈으로 쳐다보며, 코 밑까지 흘러 내린, 그 뿔테 안경을 벗었다. 난 그제서야 그녀의 눈이 그 멍청해 보이는 안경 속에서, 그 두껍던 안경알의 돗수 속에서도 아름답게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원래 눈 안 나뻐. 양 쪽 다 2.0인 거, 너도 몰랐지?’
‘그런데, 왜 안경은 끼고 살았니?’
‘그래야 더 멍청해 보이잖아!’
그녀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밖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자신의 멍청한 모습을 스스로 연출하며, 불편함과 어지러움이 동반된 똥글뱅이 돗수 높은 안경에다, 좇 같은 디자인의 뿔테 안경을 기어이 걸고 살아왔던 그녀……
‘이제 그만 할 때도 됐잖아?’
‘그런가?’
‘세상사 별 거 있어? 그냥 그렇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거지.’
‘우습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넌 그때, 내가 울면서 하는 얘기를 다 듣고도, 지금과 똑 같은 얘기로 나를 위로 한 거 알아?’
‘내가 그랬나?’
‘응. 너무 어른 스럽게….그때는 내 키가 더 커서, 누나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컸다니?’
‘남자들은 여자보다 늦어….항상은 아니지만….내가 바래다 줄까?’
‘그래 주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니 애인이 볼라! 나 같은 과부댁 만나고 다닌다고, 너 M아 씌우면 어쩔래?’
‘어쩌긴, 동창인데, 열나 섹쉬 해서, 안 만날 수가 없었다고 뻥치지 뭐.’
‘그럴 용기도 없어 뵈는데? 내 말이 맞쥐? 넌 그때나 지금이나 나보다 용기가 없잖아?’
‘하긴…..넌 용감해. 아직도…..’
난 그녀의 호탕함이, 대범함이 그 쪼잔한 안경에 걸려 있었어도 알 만한 사람은 알 수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럴까? 아니! 모를 거야. 네가 유일하게 나의 얘기를 들어준 친구였어. 아무도 짐작 못 하더라구. 어! 어지럽다….이제 그만 마실란다. 핸폰으로 우리 아찌 좀 불러줄래? 참! 니 명함이나 한 장 주라.’
난 그녀의 핸폰을 열고, 그녀가 가르쳐 주는 예약버튼을 눌러 그녀의 운전기사를 호출했다. 얼마 있질 않아, 아까 지하 주차장에서 본 거의 할아버지에 가깝던 그 기사가 호텔로 그녀를 데리러 들어왔다.
‘아가씨, 많이 취하셨네요. 어여 가시죠.’
‘아찌….아찌….이 사람 기억 나? 나 중학교 때, 다리 다쳐서 줄창, 가방 들어 주던 애 잖아?’
‘아! 그러세요? 반갑습니다. 아까는 몰라 뵙고….’
‘괜찮습니다. 명희가 많이 취했네요. 제가 말렸는데도, 어찌나 빠르게 들이키던지…..’
‘그래도 오늘은 전화라도 해서 다행 이네요. 하도 이곳 저곳에서 쓰러지셔서, 항상 맘이 놓이질 않죠. 그렇다고 이 늙은 얼굴로 다 따라 다닐 수도 없고서리…..’
그는 그녀가 시집 가기 전부터 그녀를 모시던 기사 아저씨 였다. 나도 허옇게 변해 버린 그분의 머리칼과 얼굴의 주름으로 인해, 알아보지 못했기는 마찬가지 였고……
‘잘 가라, 명희야!, 몸 조심하고….술 쫌 작작 퍼! 니가 무신 술상무도 아니고설랑….’
‘자, 여기! 오랜만에 만나서 줄 껀 없고…..자, 여기 술잔…..기념으로 줄께. 또 볼 일 있겠니? 너도 살아가기 바쁘고, 나도 그럴테고…그래도 기념으로 간직해. 내 이쁜 입술이랑, 루즈 자국 보이지? 혹시 아니? 내가 죽은 후에 그게 비싼 값에 팔릴지? 안녕, 잘 살아!’
‘지가 무신 마릴린 몬론 줄 안다니깐. 어여 가! 늦었다.’
대낮부터 마신 술이 한밤중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가고,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서, 그녀가 주고 간 술잔을 바라다 보고 있었다. 담배를 피워 물고 살펴보면서, 나는 그 루즈 자국이 너무 아름답다는, 지극히 매혹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술잔을 내려다 보면서, 그녀나, 나나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었고, 상식도, 도덕도 사라진, 비슷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것으로 인해, 그 술잔은 더욱 의미 있게, 내 손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세상은 그렇게 상식으로 무장된, 이른바 바른 생활을 위한 대다수를 위해 도도히 굴러갈 것이다. 부친의 불거진 좇대가리가 여린 그녀의 보지를 갈갈이 찢어 놓으면서도, 울음을 참아가며, 엎드려 영어 단어를 외워야 했으며, 그 치 떨리던 섹스의 수치심을 잠시라도 면해 보려고, 지 스스로 침대에 다리를 날려야 했던 그녀나, 작은 체구였지만 유달리 조숙하고, 건실했던 좇대를 갖고 있었다는 이유 때문 인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목욕을, 잠자리를 같이해야 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나나 별반 다를 바는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 어린 나이에도 나에게 먼저 입을 연 그녀의 용기를 난 흉내 낼 수조차 없었다. 난 그녀의 말대로 겁쟁이인지 모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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