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을 해치우다 - 1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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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파서 좀 더 먹겠다는 나를 제지한 테리우스가 방으로 돌아가서 자기 지갑을 챙겨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난 고기를 먹는 것을 그만뒀다. 지가 쏘겠다면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안주를 좀 더 집어먹으면 그만이다 싶어서, 난 테리우스를 태우고 강릉 시내로 향했다. 테리우스는 강릉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형, 여기서 좌회전, 저기 쭉가서 편의점 앞에서 유턴이라면서 계속 운전을 리드했는데, 보통 시내지리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 강릉을 대체 얼마나 자주 오는 거냐? 훤하네."
"아, 이야기 안했었나. 우리 집이 강릉이잖아. 교회도 여기 있고."
"그래? 서울서 하는 거 아니었어?"
"응, 아버지는 서울에 계시지. 그런데, 본당은 여기. 형이 맡아서 하고 있지."
"아버지 곁에 있지 않고?"
"좀 괴로워하고 있지.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운 거야. 아버지 재판에 들어가면서부터 형은 본당에 내려와서 기도를 계속하고 있거든.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형도 어느 정도는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것 같아. 처음에는 진짜로 아버지가 여고생이랑 자고 그런 것도, 모두 아버지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그 대상이 자꾸 어려지고, 여중생이랑 아버지가 하고, 그 엄마랑도 하고 그런 것을 목격하면서부터는 조금씩 아닌 것을 아는 눈치야. 그래도 여전히 고리타분하게 충직하긴 하지만."
"나라도 그러겠다. 왜 옛날 휴거를 믿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자살하고 그랬잖아. 이게 아니야 하고."
"아, 휴거. 형도 믿었었어?"
"난 너무 어려서 그냥 믿지 않았지. 난 엄마 말을 아주 잘 따르는 애였으니까."
"형 지금을 보면 예전에 형이 어땠을 지 좀 상상이 가기도 한다. 엄청 고루했을 것 같아."
"좀 그랬지."
뒷골목을 한참 돌고돌아서 슬럼가 비슷한 곳에 도착했다. 테두리 왼쪽 상단에 뜯어진 앵두라는 간판이 보였다. 테리우스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저기냐?"
"응. 끝내주는 곳이지. 내가 세팅도 다 해놨어. 형은 써니 스타일로. 나는 제시카랑 태연 스타일로 해 달라고 했지."
"뭐야? 넌 둘이냐?"
"형,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섹스 중에 뭐가 제일 좋은 줄 알아?"
"그게 무슨 소리냐?"
"여자 둘이랑 하는 건 말이야. 의외로 재미가 없어. 힘만 들거든. 남자 둘이 여자 하나랑 하는 것도 재미가 없지. 그건 이상하게 경쟁심을 자극해서, 정신적으로 피곤해지거든. 여자는 힘들어 하기만 하고. 내가 찾아낸 최적이 남자 둘에 여자 셋이야. 그게 왜 좋냐면, 여자가 쉴 수가 있거든. 남자도 굳이 모든 여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주박에서 벗어날 수가 있거든. 왠지 모르게 여유가 있어지지. 여자가 하나 남으니까 서로 경쟁심이 붙어서 분위기가 금방 달아오르거든."
"해 봤냐?"
"나야, 안 해본 게 있나."
"너도 너다. 근데, 진짜 소시랑 닮은 여자들이 나오는 거냐?"
"그렇게 에이급은 안 나오지. 여기는 그저 질펀하게 놀려고 오는 덴데. 내 특별 주문이 없었으면 그냥 한복 달랑 입고 와서 바로 벗는 데야."
"내리자."
"역시 형은 빼지 않아서 좋다니까."
카펫이 깔린 계단은 구두 소리가 나질 않아서 좋았다.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휘파람을 부르며 내 뒤를 따라 들어오던, 테리우스는 지배인인 듯한 정장을 입은 남자를 보자마자 갑자기 씨발이라고 작게 욕설을 한 후,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형, 나가자."
"왜? 누군데 그래?"
"우리 형."
"응?"
"우리 형이라고. 그 목사 한다는 형 말이야."
"어?"
"안녕하세요. 이경민씨. 이진섭입니다. 못난 녀석 잘 이끌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들어가셔서 잠시 이야기나 하시죠."
"네, 안녕하세요."
미리 준비를 해 놓았는지, 테리우스의 형이 안내한 방엔 룸싸롱에서나 볼 수 있는 양주병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포카리 스웨트가 있어서 고기를 먹고 입이 텁텁해진 김에 컵에 따라 마셨는데, 테리우스도 작은 피티를 따더니 벌컥벌컥 마시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인사 드리죠. 이진섭입니다. 저도 서른 하납니다. 경민씨랑 나이가 같아요."
"저에 대해서 잘 아시나 봅니다."
"동생놈이 잘 따르는 것 같아, 이런 이야기하면 좀 미안한 일인줄 아는데, 따로 좀 조사를 했었습니다. 훌륭하신 분이더군요. 앞으로도 진명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진천댁 아주머니 전화를 받았습니다. 동생이 왔다더군요. 진명이가 강릉에 온 이상 제 이목을 벗어나기는 힘들죠."
"그만 해. 경민이 형은 그냥 둬. 좋은 사람이니까. 형이랑은 다른 사람이니까. 형, 가자. 저 사람이랑 눈을 마주치고있는 게 싫어서 그래."
"동생이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돕고 싶은데, 저 가지고는 안되나 봅니다. 원치 않은 만남이었나 봅니다. 목사님도 편찮으시고 세상엔 형제밖에 없는데요. 이 형은 동생을 위해서라면 팔이라도 하나 뚝 잘라서 줄 수 있는데요."
테리우스가 너무 불안해 했기 때문에, 난 자리를 파하고 일어나서, 차로 가자마자, 녀석에게 물었다.
"형이 좋은 사람 같던데. 왜 그러냐?"
"진짜 끔찍한 사람이야. 방금 전에 그 말 거짓말 아니야.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무슨 말?"
"자기 팔을 잘라 줄 수도 있다는 말. 어릴 적에 아버지가 조금 아팠을 때 자기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를 먹인 사람이거든."
"단지를 했다고?"
"돌았어. 돌았다고."
"미친 것처럼 보이지는않던데. 좀 차가운 면은 있지만, 좋은 사람 같던데."
"하지 못할 일이 없는 사람이야.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아픈 신도를 먹인다고 저체온증에 걸려 기절하기 직전까지 잉어잡으러 다니는 인간이라고."
"그건 좋은 거잖아."
"문제는 저 인간이 계산없는 선의를 통해 이루려는 꿈이 거짓이라는 데에 있어. 진심을 다해서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고. 답답한 인간이야. 진짜."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갈 곳을 안 거야? 네 형이 네가 그곳을 갈 지 어떻게 알았느냐고."
"아버지에게, 형에게 감화를 받은 인간이 강릉엔 만명이 넘어. 아마 형이 절 위해서 죽어주세요라고 하면, 죽을 인간이 백은 될거야. 그런 곳이니 형이 원하는 정보는 뭐든 형에게 오게 되어 있어. 아마 경찰서를 동원하던가 했겠지. 차가운 이성을 지니면서도 너무 뜨거운 마음을 가진 겸허하고 훌륭한 인간이 바로 우리 형이라고."
놀랄만한 사람이었다. 이성적이면서 뜨거운 심장을 가진 지배력을 가진 인간이라니. 내가 완벽하게 꿈꾸는 인간형이었다. 진저리를 치는 테리우스와는 다르게 난 그 형이라는 사람을 보자마자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 삶은 뜻이 있다고 누구나 살 수 있는 삶은 아니다. 강한 자기 절제가 필요할 것이다. 마음의 갈등도 수도 없이 일어날 것이다. 똑똑한 인간일수록 더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의 삶을 통해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는 인생을 살 수 없다.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테리우스는 짐을 쌌지만, 난 하루종일 너무 운전을 많이 해서 피곤해 더는 못하겠다면서 손님방에 들어가서 눈을 감았다. 점점 더 테리우스의 형이 또렷하게 생각이 났다. 그만큼 그의 인상은 강렬했다.
잠을 충분하게 자지 못한 것 같은데도 깼더니 아침 열시가 지나 있었다. 어젠 너무나 많은 일이 있어서 오래 잤지만 몸이 개운하지 않았다. 슬쩍 안방을 봤더니 테리우스는 아직 자고 있었는데, 침대 협탁 옆에 양주병이 있는 걸로 봐서, 어제 형 때문에 불안해하다가 술을 퍼마시고 잠이 든 것 같았다. 씻기전에 잠깐 바람이나 맞을까 해서 츄리닝을 입고 별장 밖으로 나갔더니, 누군가 별장의 잔디에 물을 주며 어떤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별장에 물을 주고 있던 사람은 테리우스의 형 이진섭이었고, 그 옆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사라였다. 어떻게 둘이 아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놀라운 투샷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둘을 지켜보는데, 그런 나를 발견한 두사람이 반가움과 묘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테리우스의 형은 물을 잠그더니 사라를 데리고 현관의 내쪽으로 향했다.
"아시는 분이시죠? 이야기를 좀 나누세요. 점심은 우리 신도분께서 물회를 대접하신다니, 그 쪽에 가서 할테니. 그 전엔 시간이 있는 셈입니다. 경민씨, 우리 꼬맹이 동생은 아직도 자고 있나요?"
"예."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야 남을 섬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까요."
테리우스의 형이 테리우스를 깨우러 별장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난 사라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예뻤다. 난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목사님이 구해 주셨어요."
"응?"
"구원은 선물이랬어요.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면 좋은 선물 하나쯤은 받아도 되는 거라고 하셨어요. 가만히 나를 보시더니, 가장 원하는 걸 주시겠다고, 절 여기로 데리고 오셨어요. 믿으면 그저 온전히 믿으면요. 기적이 언제나 내 앞에 생긴댔어요. 전 지금이 기적같아요."
"바쁘지 않아? 드라마를 찍고 있다며?"
"바쁘지 않아요. 전 이번 드라마만 찍으면 은퇴할 생각이에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오빠만 보면서 살려고요."
"그러면 안되는 거 아니야? 네 삶을 살아야지."
"오빠를 사랑하는 게 제가 평생 후회하지 않고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에요. 난 그렇게 살기로 이미 마음을 굳혔어요. 목사님이 그러셨어요. 사랑도 믿음도 소망도 모두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요. 전 오빠를 사랑하고, 목사님을 믿고, 행복한 우리의 삶을 소망하니까 모두를 이룰 수 있다고 하셨어요."
사랑이나 믿음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저런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천 명에 한 명도 많다. 내 앞에서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라가 진짜로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테리우스 형 이진섭의 말에 이끌려 그런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두렵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알 수 없는 한기가 들었다. 내 앞의 사라가 예전의 그 사라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편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맛있는 밥을 먹고 싶었다. 난 사라를 잠시 현관에 둔 채, 방으로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고, 지갑을 챙겨 나왔다. 사라의 손을 잡고 별장근처의 해안을 향해 걸었다.
"어떻게 지냈어? 잘 살았어?"
"......"
대답이 없는 사라에게 어떤 말도 물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살아온 걸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지난 2년을 살았는지를 이야기 하고 싶었다.
"난 말이야. 네가 없으니까 무지 시간이 가질 않더라. 너랑 있을 때는 하루하루가 엄청 신났었거든. 너랑 만나도 별 건 하지 않았잖아. 가게 앞 부대찌게 집 가서 부대찌게 먹고, 차 마시러 다니고 그랬었잖아.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 집에 가서 늘 앉던 우리 자리에 가서 밥을 먹었거든. 혼자서. 맛이 없더라. 평소에 쓰는 감정의 반의 반도 쓰지 못했어. 웃는 것도 그렇고, 우는 것도 그렇고. 인생이 빈약해졌어. 진짜."
"오빠. 나는요. 즐겁게 살았어요. 목표가 있었으니까요. 언젠가는 오빠 앞에 떳떳하게 서고 싶었어요. 부끄러운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오빠에게 당당한 사람으로요. 그러기위해서 노력했어요. 몇번이고 무너질 뻔 했어요. 그때마다 전 웃었어요. 커진 건 독기가 아니라 그저 오빠를 사랑하는 마음이었죠. 토크쇼에 나가서 오빠를 자랑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생각했어요. 오빠는 언제나 내 자랑이니까요."
몇번이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던 여자가 있었었다. 대학교 때 좋아했던 여자였는데, 좋아서 만나서, 싫어서 헤어지고, 그러다가 우연히라도 만날 기회가 있으면 다시 만나고, 만나면 좋고 그래서 다시 또 사귀고 그러다 싸우고, 싸우면 연락이 끊기고.. 그 여자는 몇 번을 헤어지고 다시 만났어도 늘 감정선이 선명하게 살아났었다. 내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련했던 여배우이자 옛사랑인 사라는 그 때의 사라가 아니었다. 아련하고 애잔한 사라는 지금 여기에 없었다. 예쁜 얼굴에 꿈꾸는 듯한 표정의 사라는 그냥 예쁜 아가씨일 뿐, 여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혹시나 내가 테리우스의 형을 의심해서 그런 건가라고 몇 번이고 내 마음의 떨림을 느껴보려 했지만, 식은 심장엔 피가 돌지 않았다. 고백에 고백을 들으면서도 점점 지루해졌다. 예전엔 진짜로 시간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는데. 좋았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사랑은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연애란 현재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살기 위해 하는 것이 사랑이다. 과거는 힘이 없다.
별장 근처를 한 바퀴 돌고 왔더니, 테리우스의 형은 벌써 어디론가 가고 없었고, 샤워를 마치고 나온 테리우스가 사라를 보고 깜짝 놀라서 어색하게 인사를 건냈다. 사라도 테리우스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테리우스의 형을 찾는 듯 했다.
"형은 어디 가셨어?"
"수금하러 갔어."
"수금을 하다니?"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거든. 아마 형 앞으로 보험을 몇 개나 들어놓았을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형이 돈을 받는 거냐?"
"강제적으로 시키는 게 아니야. 사기치는 것도 아니고, 형이 제일 나쁜게 그거거든. 아버지는 자기가 사기를 치는 걸 알아. 하지만, 형은 사기를 치지 않지만, 어쨌거나 보험의 수익자가 되고말지."
"목사님은 그런 분이 아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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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강릉을 대체 얼마나 자주 오는 거냐? 훤하네."
"아, 이야기 안했었나. 우리 집이 강릉이잖아. 교회도 여기 있고."
"그래? 서울서 하는 거 아니었어?"
"응, 아버지는 서울에 계시지. 그런데, 본당은 여기. 형이 맡아서 하고 있지."
"아버지 곁에 있지 않고?"
"좀 괴로워하고 있지.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운 거야. 아버지 재판에 들어가면서부터 형은 본당에 내려와서 기도를 계속하고 있거든.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형도 어느 정도는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것 같아. 처음에는 진짜로 아버지가 여고생이랑 자고 그런 것도, 모두 아버지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그 대상이 자꾸 어려지고, 여중생이랑 아버지가 하고, 그 엄마랑도 하고 그런 것을 목격하면서부터는 조금씩 아닌 것을 아는 눈치야. 그래도 여전히 고리타분하게 충직하긴 하지만."
"나라도 그러겠다. 왜 옛날 휴거를 믿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자살하고 그랬잖아. 이게 아니야 하고."
"아, 휴거. 형도 믿었었어?"
"난 너무 어려서 그냥 믿지 않았지. 난 엄마 말을 아주 잘 따르는 애였으니까."
"형 지금을 보면 예전에 형이 어땠을 지 좀 상상이 가기도 한다. 엄청 고루했을 것 같아."
"좀 그랬지."
뒷골목을 한참 돌고돌아서 슬럼가 비슷한 곳에 도착했다. 테두리 왼쪽 상단에 뜯어진 앵두라는 간판이 보였다. 테리우스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저기냐?"
"응. 끝내주는 곳이지. 내가 세팅도 다 해놨어. 형은 써니 스타일로. 나는 제시카랑 태연 스타일로 해 달라고 했지."
"뭐야? 넌 둘이냐?"
"형,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섹스 중에 뭐가 제일 좋은 줄 알아?"
"그게 무슨 소리냐?"
"여자 둘이랑 하는 건 말이야. 의외로 재미가 없어. 힘만 들거든. 남자 둘이 여자 하나랑 하는 것도 재미가 없지. 그건 이상하게 경쟁심을 자극해서, 정신적으로 피곤해지거든. 여자는 힘들어 하기만 하고. 내가 찾아낸 최적이 남자 둘에 여자 셋이야. 그게 왜 좋냐면, 여자가 쉴 수가 있거든. 남자도 굳이 모든 여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주박에서 벗어날 수가 있거든. 왠지 모르게 여유가 있어지지. 여자가 하나 남으니까 서로 경쟁심이 붙어서 분위기가 금방 달아오르거든."
"해 봤냐?"
"나야, 안 해본 게 있나."
"너도 너다. 근데, 진짜 소시랑 닮은 여자들이 나오는 거냐?"
"그렇게 에이급은 안 나오지. 여기는 그저 질펀하게 놀려고 오는 덴데. 내 특별 주문이 없었으면 그냥 한복 달랑 입고 와서 바로 벗는 데야."
"내리자."
"역시 형은 빼지 않아서 좋다니까."
카펫이 깔린 계단은 구두 소리가 나질 않아서 좋았다.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휘파람을 부르며 내 뒤를 따라 들어오던, 테리우스는 지배인인 듯한 정장을 입은 남자를 보자마자 갑자기 씨발이라고 작게 욕설을 한 후,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형, 나가자."
"왜? 누군데 그래?"
"우리 형."
"응?"
"우리 형이라고. 그 목사 한다는 형 말이야."
"어?"
"안녕하세요. 이경민씨. 이진섭입니다. 못난 녀석 잘 이끌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들어가셔서 잠시 이야기나 하시죠."
"네, 안녕하세요."
미리 준비를 해 놓았는지, 테리우스의 형이 안내한 방엔 룸싸롱에서나 볼 수 있는 양주병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포카리 스웨트가 있어서 고기를 먹고 입이 텁텁해진 김에 컵에 따라 마셨는데, 테리우스도 작은 피티를 따더니 벌컥벌컥 마시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인사 드리죠. 이진섭입니다. 저도 서른 하납니다. 경민씨랑 나이가 같아요."
"저에 대해서 잘 아시나 봅니다."
"동생놈이 잘 따르는 것 같아, 이런 이야기하면 좀 미안한 일인줄 아는데, 따로 좀 조사를 했었습니다. 훌륭하신 분이더군요. 앞으로도 진명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진천댁 아주머니 전화를 받았습니다. 동생이 왔다더군요. 진명이가 강릉에 온 이상 제 이목을 벗어나기는 힘들죠."
"그만 해. 경민이 형은 그냥 둬. 좋은 사람이니까. 형이랑은 다른 사람이니까. 형, 가자. 저 사람이랑 눈을 마주치고있는 게 싫어서 그래."
"동생이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돕고 싶은데, 저 가지고는 안되나 봅니다. 원치 않은 만남이었나 봅니다. 목사님도 편찮으시고 세상엔 형제밖에 없는데요. 이 형은 동생을 위해서라면 팔이라도 하나 뚝 잘라서 줄 수 있는데요."
테리우스가 너무 불안해 했기 때문에, 난 자리를 파하고 일어나서, 차로 가자마자, 녀석에게 물었다.
"형이 좋은 사람 같던데. 왜 그러냐?"
"진짜 끔찍한 사람이야. 방금 전에 그 말 거짓말 아니야.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무슨 말?"
"자기 팔을 잘라 줄 수도 있다는 말. 어릴 적에 아버지가 조금 아팠을 때 자기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를 먹인 사람이거든."
"단지를 했다고?"
"돌았어. 돌았다고."
"미친 것처럼 보이지는않던데. 좀 차가운 면은 있지만, 좋은 사람 같던데."
"하지 못할 일이 없는 사람이야.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아픈 신도를 먹인다고 저체온증에 걸려 기절하기 직전까지 잉어잡으러 다니는 인간이라고."
"그건 좋은 거잖아."
"문제는 저 인간이 계산없는 선의를 통해 이루려는 꿈이 거짓이라는 데에 있어. 진심을 다해서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고. 답답한 인간이야. 진짜."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갈 곳을 안 거야? 네 형이 네가 그곳을 갈 지 어떻게 알았느냐고."
"아버지에게, 형에게 감화를 받은 인간이 강릉엔 만명이 넘어. 아마 형이 절 위해서 죽어주세요라고 하면, 죽을 인간이 백은 될거야. 그런 곳이니 형이 원하는 정보는 뭐든 형에게 오게 되어 있어. 아마 경찰서를 동원하던가 했겠지. 차가운 이성을 지니면서도 너무 뜨거운 마음을 가진 겸허하고 훌륭한 인간이 바로 우리 형이라고."
놀랄만한 사람이었다. 이성적이면서 뜨거운 심장을 가진 지배력을 가진 인간이라니. 내가 완벽하게 꿈꾸는 인간형이었다. 진저리를 치는 테리우스와는 다르게 난 그 형이라는 사람을 보자마자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 삶은 뜻이 있다고 누구나 살 수 있는 삶은 아니다. 강한 자기 절제가 필요할 것이다. 마음의 갈등도 수도 없이 일어날 것이다. 똑똑한 인간일수록 더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의 삶을 통해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는 인생을 살 수 없다.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테리우스는 짐을 쌌지만, 난 하루종일 너무 운전을 많이 해서 피곤해 더는 못하겠다면서 손님방에 들어가서 눈을 감았다. 점점 더 테리우스의 형이 또렷하게 생각이 났다. 그만큼 그의 인상은 강렬했다.
잠을 충분하게 자지 못한 것 같은데도 깼더니 아침 열시가 지나 있었다. 어젠 너무나 많은 일이 있어서 오래 잤지만 몸이 개운하지 않았다. 슬쩍 안방을 봤더니 테리우스는 아직 자고 있었는데, 침대 협탁 옆에 양주병이 있는 걸로 봐서, 어제 형 때문에 불안해하다가 술을 퍼마시고 잠이 든 것 같았다. 씻기전에 잠깐 바람이나 맞을까 해서 츄리닝을 입고 별장 밖으로 나갔더니, 누군가 별장의 잔디에 물을 주며 어떤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별장에 물을 주고 있던 사람은 테리우스의 형 이진섭이었고, 그 옆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사라였다. 어떻게 둘이 아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놀라운 투샷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둘을 지켜보는데, 그런 나를 발견한 두사람이 반가움과 묘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테리우스의 형은 물을 잠그더니 사라를 데리고 현관의 내쪽으로 향했다.
"아시는 분이시죠? 이야기를 좀 나누세요. 점심은 우리 신도분께서 물회를 대접하신다니, 그 쪽에 가서 할테니. 그 전엔 시간이 있는 셈입니다. 경민씨, 우리 꼬맹이 동생은 아직도 자고 있나요?"
"예."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야 남을 섬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까요."
테리우스의 형이 테리우스를 깨우러 별장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난 사라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예뻤다. 난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목사님이 구해 주셨어요."
"응?"
"구원은 선물이랬어요.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면 좋은 선물 하나쯤은 받아도 되는 거라고 하셨어요. 가만히 나를 보시더니, 가장 원하는 걸 주시겠다고, 절 여기로 데리고 오셨어요. 믿으면 그저 온전히 믿으면요. 기적이 언제나 내 앞에 생긴댔어요. 전 지금이 기적같아요."
"바쁘지 않아? 드라마를 찍고 있다며?"
"바쁘지 않아요. 전 이번 드라마만 찍으면 은퇴할 생각이에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오빠만 보면서 살려고요."
"그러면 안되는 거 아니야? 네 삶을 살아야지."
"오빠를 사랑하는 게 제가 평생 후회하지 않고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에요. 난 그렇게 살기로 이미 마음을 굳혔어요. 목사님이 그러셨어요. 사랑도 믿음도 소망도 모두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요. 전 오빠를 사랑하고, 목사님을 믿고, 행복한 우리의 삶을 소망하니까 모두를 이룰 수 있다고 하셨어요."
사랑이나 믿음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저런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천 명에 한 명도 많다. 내 앞에서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라가 진짜로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테리우스 형 이진섭의 말에 이끌려 그런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두렵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알 수 없는 한기가 들었다. 내 앞의 사라가 예전의 그 사라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편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맛있는 밥을 먹고 싶었다. 난 사라를 잠시 현관에 둔 채, 방으로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고, 지갑을 챙겨 나왔다. 사라의 손을 잡고 별장근처의 해안을 향해 걸었다.
"어떻게 지냈어? 잘 살았어?"
"......"
대답이 없는 사라에게 어떤 말도 물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살아온 걸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지난 2년을 살았는지를 이야기 하고 싶었다.
"난 말이야. 네가 없으니까 무지 시간이 가질 않더라. 너랑 있을 때는 하루하루가 엄청 신났었거든. 너랑 만나도 별 건 하지 않았잖아. 가게 앞 부대찌게 집 가서 부대찌게 먹고, 차 마시러 다니고 그랬었잖아.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 집에 가서 늘 앉던 우리 자리에 가서 밥을 먹었거든. 혼자서. 맛이 없더라. 평소에 쓰는 감정의 반의 반도 쓰지 못했어. 웃는 것도 그렇고, 우는 것도 그렇고. 인생이 빈약해졌어. 진짜."
"오빠. 나는요. 즐겁게 살았어요. 목표가 있었으니까요. 언젠가는 오빠 앞에 떳떳하게 서고 싶었어요. 부끄러운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오빠에게 당당한 사람으로요. 그러기위해서 노력했어요. 몇번이고 무너질 뻔 했어요. 그때마다 전 웃었어요. 커진 건 독기가 아니라 그저 오빠를 사랑하는 마음이었죠. 토크쇼에 나가서 오빠를 자랑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생각했어요. 오빠는 언제나 내 자랑이니까요."
몇번이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던 여자가 있었었다. 대학교 때 좋아했던 여자였는데, 좋아서 만나서, 싫어서 헤어지고, 그러다가 우연히라도 만날 기회가 있으면 다시 만나고, 만나면 좋고 그래서 다시 또 사귀고 그러다 싸우고, 싸우면 연락이 끊기고.. 그 여자는 몇 번을 헤어지고 다시 만났어도 늘 감정선이 선명하게 살아났었다. 내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련했던 여배우이자 옛사랑인 사라는 그 때의 사라가 아니었다. 아련하고 애잔한 사라는 지금 여기에 없었다. 예쁜 얼굴에 꿈꾸는 듯한 표정의 사라는 그냥 예쁜 아가씨일 뿐, 여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혹시나 내가 테리우스의 형을 의심해서 그런 건가라고 몇 번이고 내 마음의 떨림을 느껴보려 했지만, 식은 심장엔 피가 돌지 않았다. 고백에 고백을 들으면서도 점점 지루해졌다. 예전엔 진짜로 시간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는데. 좋았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사랑은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연애란 현재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살기 위해 하는 것이 사랑이다. 과거는 힘이 없다.
별장 근처를 한 바퀴 돌고 왔더니, 테리우스의 형은 벌써 어디론가 가고 없었고, 샤워를 마치고 나온 테리우스가 사라를 보고 깜짝 놀라서 어색하게 인사를 건냈다. 사라도 테리우스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테리우스의 형을 찾는 듯 했다.
"형은 어디 가셨어?"
"수금하러 갔어."
"수금을 하다니?"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거든. 아마 형 앞으로 보험을 몇 개나 들어놓았을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형이 돈을 받는 거냐?"
"강제적으로 시키는 게 아니야. 사기치는 것도 아니고, 형이 제일 나쁜게 그거거든. 아버지는 자기가 사기를 치는 걸 알아. 하지만, 형은 사기를 치지 않지만, 어쨌거나 보험의 수익자가 되고말지."
"목사님은 그런 분이 아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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